작성일 : 15-08-31 23:53
제2회 기능 장려수기작품 현상공모 우수상 당선작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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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기능 장려수기작품 현상공모 우수상 당선작
직 장 명 : 청호산업주식회사(대표이사)

 

내용 :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훈련원을 1년 수료하고 건설현장에 뛰어들어 세상에서 기술에서 일등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술을 배웠고 22년이라는 준비기간을 거처 내 스스로 법인 건설 회사를 설립하였고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돈을 벌지 는 못 하였지

만 세상에서 제일 쉬 운 게 돈 버는 일 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업하는 대표이사가 되어 온 이야기입니다

 

 

 

 

 

 

 


 어린시절 아주 깊숙한 시골에서 태어나 보리밥도 모자라 배를 채우지 못 하는 가정형편상 지금 생각해도 어린시절의 나의 꿈은 없는 거 같았다.

 초등학교 5 학년 때부터 아침 에 일어나면 아버지 따라 고기잡이를 나가야하였고 잡은 고기를 학교 가는 길에 팔 고 가야만했던 어린 시절 이였기에 아무런 꿈도 없이 어찌하면 학교 가는 오백 여 미터 되는 길을 지나는 동안 손에든 고기를 팔수 있을까 팔리지 않으면 오늘은 누구를 주고 갈까 오늘은 고모 집 내일은 삼촌 집 또 하루는 교장선생님 아님 담임선생님 그 시절 어렵게 잡은 고기를 누구를 얼마나 그냥 갔다 줬는지 아마 수없이 많 앗 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쯤부터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난 사실 중학교도 못 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중학교는 갈수 있었고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지 않으니 남 의 집은 무슨 밥을 먹고 사는지 몰랐지만 중학교 에서는 도시락을 여는 순간 밥의 명암이 엇갈려서 그 시절 쌀밥이 무언지 점심때만 되면 사실 힘들 엇 다. 그러던 어느 때 인가 할아버지 제사를 모신 다음날 점심시간 내 생에 가장 창피 한 걸로 기역 된다 열어보니 하얀 쌀 밥 이였다.

 의기당당 아니 위풍당당 나도 쌀밥 일 때가 있다 목 에 힘을 주고 한 젓가락을 집어서 입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 위에만 쌀을 덮어두셨다 순간 이밥을 먹을 까 덮어버릴까 아마도 음식을 먹으면서 그렇게 창피 하게 먹 어 본적이 잇 을까?

 그날 집 에 돌아와서 따졌다 형 오늘 무슨 밥 이였어?

 

 쌀밥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는 나에게 미안함을 표 헌 하고 계셨다.

 나의 몸의 맞는 교복한번 입어보지 못 하고 1980년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던 겨울 그래도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추천을 받아 국립 기계 공고 입학원서를 한참 쓰고 있을 때었다.

나 또한 어렵게 전북기계공고에 원서를 낼 수 있었고 그러나 그전에 치루 엇 던 체력장 에서 달리기를 너무 못 한 결과로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울 때라 일반 공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란 힘들었다.

그 때 마침 붙은 모집광고가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지금은 나의 유일한 모교가 돼어 버린 순천직업 훈련원이었고, 배우는 것 또한 공업계 고등학교와 같은 2급 자격증이었다.

그래서 난 직업훈련원에 원서를 내기로 하고 교무실을 찾았는데, 아무나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니 여서 여수공고 합격하는 사람만 원서를 써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수공고에 합격을 한 후에 순천직업훈련원에 원서를 들고 방문하였는데 수의아저씨께서 벽에 서 보라고 하셨다. 그 때 내 키가 152였기 때문 이었다. 너무 적어서 안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처음으로 사주신 곤색 추리닝 한 벌을 입고 순천직업훈련원에 입소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여도 군 생활 훈련병 시절보다 더 혹독했던 거 같다.

어느 하루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기능사 예비시험을 보았는데 90 여 명 중 에 다섯 명만이 육십 점을 맞았고 모두 떨어졌는데 그날 삼십 명씩 세 줄로 세우더니 여섯 분의 선생님들께서 돌아가면서 다섯 대씩을 때 리 는 거 아닌가..

 그날 기압 받다보니 저녁식사도 굶어야 하였고 일년 동안 가혹하리만큼 책은 모두 암기해야했고 실기는 일 등 아니면 기압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열심히 하였고 이론은 좀 떨어졌지만 실기는 내가 용접공과 일등이었기에 내가 취업순위 5위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면접을 아무리 보아도 키 가 적 다는 이유로 번 번히 떨 어 지곤 하다 선택한곳이 목포의 한 주물공장 이였는데, 용선로에 들어갈 고철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정리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하루 일당이 2,600원인데 하루 밥값이 1,500원이였다. 3일에 한번 철야작업을 하는데 그 돈이 남는 돈이었다.

 5백 원 하는 식권으로 일요일이면 배터지게 먹어본다고 라면 세봉과 게란 두개를 바꿔서 주전자에 넣고 산소로 끓여서 먹으면 그게 얼마나 맛있던지 밥값이 비싼 관계로 자취를 시작하였는데 정부미 쌀 한 포대 사고 야근하고 퇴근길에 남의논에 있는 파 뽑아다 장에 넣고 고춧가루 뿌리면 그게 반찬의 전부였다.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을 때 나를 아껴주셨기에 잘 따랐는데 계장님과 반장님이 한꺼번에 교통사고로 두 분이 함께 하늘로 가신후로 나또한 첫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누구하나 나를 취직 시켜줄 사람은 없었고 가을 고구마 수확하는 일을 도와주고 서울로 향하게 되는데 첫 출근한곳이 종로 3가에 있는 한미은행 빌딩 기계실 설비공사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오전 용접을 배우고 오후부터 현장 용접을 하는데, 나름대로 잘 한다는 평을 받았다. 하루 일당이 6,800원이였다.

 

 

목포에서에 비하면 몇 배 엿 다.

첫 날 오전근무를 마치고 함 바 식당에 식사를 하러갔는데 지금 생각하여도 그렇게 하얗게 빛나는 쌀밥을 사실 난 본적이 없 엇다.

 너무 맛있게 보였는지라 언제 먹었는지도 모르게 먹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만 밥그릇이 비어있었고 차마 촌에서 올라와 쌀 밥 두 그릇 먹 는 다할까봐 더 달라는 소리도 못 한 채 앞으로 내 인생의 밥은 한 그릇 만 먹기로 마음을 먹 은 때가 있었고 점심 먹으러 빨리 갈려고 11층에서 밧줄타고 내려가다 8층으로 떨어져 본적도 있었고 지하 4층에서 용접하는 탱크아래 산소호스가 깔려있어 폭발사고도 겪어봤다.

구로구청에서 역까지 걸어가고 아낀 비로 90원하던 요구르트를 마시며 출근 하며 열심히 살았었고 어느 날 인가는 그 시절 아마 그 랜 져 엿을 거 같다 아침 에 출근하니 어느 현장에서 회장 이 라는 분이 오셔서 용 접 사 를 한명 지원 해주라하여 내가 가게 되었는데 갈 때는 과천어디까지 그 랜 져 을 타고 갔는데 하루 종일 지하철공사현장에서 포크레인 바가지를 타고 용접을 하다보니 작업복은 흑 투 성 이가 되어있었는데 퇴근길에는 지하철을 타고 가라 는 게 아닌 가 그러면서 차비를 주는데 그 당시 여고생들이 하얀 상의에 까만 치마를 입었는데 지하철 내에서 나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모든 시선은 나에게 잇 엇 다 그땐 철이 없어 아마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서울 생활도 , 1년 육 개월 여를 채우고 또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그길로 다시 시골로 들어가는데 우여곡절 끝에 여천공단 호남정유 정비 과에 다니는 삼촌 덕에 용접을 다시 배우게 되는데 오후 두시에 출근차로 들어가서 다섯 시까지 배우다 퇴근하기를 두 달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용접시험을 보고 합격하는 순간 외국인 감독관이 최 연소기록을 갱신했다 한다. 열 여덟 살 사 월 달 에 용접으로 말하는 육 지 알 시험에 합격 한 것이다

 

 첫 출근한 곳이 정유 탑 소금 교체하는 압력용기 청소작업이었다. 산소가 없어서 소화전을 틀어놓고 엄청난 열기를 식히면서 14일 동안 태어나서 짧은 기간이지만 참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고, 곧바로 배관현장에 투입되어 내 인생의 기능인으로의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하루 일당 14,000원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돈이었다.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 현장에서 내가 제일 많은 출근일수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결근 한 번 없고 비가와도 일한다는 생각으로 일에 임하였다. 혹시 몸이 아파도 오늘 벌어서 옷 한 벌 사 입자는 결심으로 회사 생활을 하게 된 결과 그 때 당시 호남정유 공장장의 추천을 받으면 기능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워졌고 당시 이라크 현장에 나가는 해외취업의 길 있었는데 기능대학을 가면 7년 후에 돈을 벌고 해외를 가면 5년만 벌어도 될 거 같다는 판단 하에 해외취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84년 12월 23일이였던가.

그 날은 내가 번 돈으로 전세 독채를 얻어 남동생과 여동생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한 날이었다.

 

 

해외 시험에 합격도 하였겠다.

내 생애 최고의 기분으로 누나 집에 들어갔는데 누님께서“춘수야! 시골에 좀 다녀와라” 하신다.

왜냐고 물었더니 누나는 그냥 가보라는 말씀과 갑자기 군 입대 영장이 나왔더라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정말로 아무것도 안보였다.

그길로 시골에 가보니 23일 후에 입대영장이 나와 있었고, 정말로 어렵게 살던 집에 내가 돈을 잘 벌어 살만했는데 영장이라니 아버지께서는 입영을 연기 좀 해보려고 노력하셨지만 불가능하였다.

 

 

그 일로 기능대학이니, 해외취업이니 하는 모든 것들이 다 날아가 버려다.

논산 훈련소에서 내가 살아온 길을 쓰라하여 지금껏 지내왔던 것들을 그대로 적어 제출하였더니 훈련소 세탁공장 보일러실에 자충되었고 군 생활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던 하려고 노력했다.

보일러관이 잘못되어도 내 손으로 모든 휴게시설도 신설하고 유지보수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윗분들이 군에 말뚝 박으라고 할 정도로 열심히 하던 군 생활도 끝나고 또다시 여천공단 조그만 회사에 입사하여 내 주특기인 용접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 열시까지 한달에 28일 이상 야근을 하였으니까 사람들이 날보고 돈독에 오른 사람이라고 속삭이기 시작했고 내가 해명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군 생활 30개월 동안 야근 세탁을 열시까지 하였기에 난 생활의 일부라고 말하여 주었다.

그 후 난 야근이 있을 때면 항상 야근자 명단에 끼게 되었고 딱 하루 아무도 말리지 않는 쉴 수 있는 날이 있었는데 지금의 집사람과 데이트 하는 세 번째 일요일이다. 비록 세 번 만나고 네 번째 만나서 두 평반 방에 두 동생과 함께 시작한 동거였지만 지금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두 달 동거 후 결혼을 하였고, 우린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혼여행도 가보지 못하였고 신혼 생활 10개월 후 어느 날 서울서 온 업체에 인원 지원이 있었는데 내가 어린 시절 서울서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이였다.

그래서 잘 할 수 있어서 열심히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 당시 내 기본급이 30만원 이였는데, 65만원에 보너스 400%를 준다는 조건 아닌가. 며칠간의 고민 끝에 서울에 있는 방산 정밀 확 학 에 입사를 하게 되고 그 때부터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객지 생활 7년 동안 발전소며 NCC등 공단이 있는 곳이라면 모두 돌 아 다녔다 .내가 현장소장을 나가서 일 할 때 도 용 접사 시험을 보면 함께 보았고 일을 할 때도 함께 일하기를 칠년 당시 회사에서는 내가가는 현장보다 공사비 적개 투입되고 마치는 현장이 없을 정도였다.

 

 낮으로는 함께 일하고 밤에는 내일 일 할 거 준비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는 생각으로 임 하 엿 고 현장에서 안전화를 신고서는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고 내 가족이 있는 가정은 뒷전 이였다. 잘 가면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달에 세달 만에 가정을 찾아가며 열심히 직장에 최선을 다하였고 그러던 어느 때 집을 찾았는데, 이제 집에서 함께 살면 안 되겠냐고 하는 와이프의 한마디에 마음의 결정을 내려버렸다.

그러나 며칠 남지 않은 날에 아버지의 회갑이 돌아오고 있었다.

회갑연에서 자식 소개 할 때 변변한 직장 다니는 아들 하나 없을 거 같아서 작은 아들 방산정밀화학에 다닌다는 그 한마디를 듣기위해서 사직일 을 뒤로 미루었고 회갑을 마친 후 충남 당진 한보철강 현장에서 일하던 중 사장님이 현지를 방문 하셨는데 기사 편에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현장의 업무 인수를 마치고 본사에 들려서 인사를 드리려고 찾았는데 그 때 사장님께서 아는 체를 하지 않으셨다.

 

 아침조회가 끝나고 나를 보자고 하시더니 다시 이야기 좀 해 볼 수 있겠냐고 하셔서 내가 그랬다

 “사장님 저 7년 동안 고생 많이 한거 아시죠?” 그랬더니 아신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춘수야! 고생했다. 한 말씀만 하시고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했더니 고생했다는 말씀을 하셨고 나에게 이렇게 살아 라고 쪽지에다 적어주셨다 형제간에 동업하지 말고 알았던 사람을 잊으려하지 말고. 항상 회사의 문은 열려있으니 힘들고 안 되면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드리고 나오고 공장장님을 부르시더니 차비해서 내려 보내라고 백만 원을 봉투에 넣어서 가지고 나오시는 게 아닌가요.

 모든 직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싫다고 가는 사람 욕하는 건 봐도 저런 모습은 처음이라고들 김 대리가 대단했긴 대단하였나보다고들 입을 모으셨고, 그 길로 여수행열차에 몸을 싣는 다.

 

 그동안 7년여를 몰라라 했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함께 사업을 하자고 했던 형과 함께 제2의 노가다의 길로 접어들었다 .

 다행이 용접을 잘 배워뒀던 터라 잘 할 수 있었고, 그해 5월말부터 벌판에서 탱크를 제작하였는데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 탱크 용접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였다.

두 달여를 오로지 용접만을 하다보니 그리도 힘들었는데 체중이 10kg가 증가했다.

 

 그 정도로 마음은 편했다는 것이다. 결혼 후 십 개월 만에 객지 생활을 시작하여 7년여 만에 돌아온 가정은 신혼이나 다름없었고 비록 노가다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내 인생에 가장 편안한 한때였다.

그 편안한 마음도 잠시 매일 함께 하던 형이 삼성중공업에 특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는 사람하나 없는 곳에 혼자 버려진 것이다. 용접만 잘했지 다른 기술은 없을 때인지라 어느 날 공장에 무슨 기술 적인 공사가 들어왔는데 전혀 모르는 일이었고 난 거제도로 형을 찾아갔다. 계산기를 배우기 위해서였고 이해는 안 갔지만 노트에 적어가면서 삼각법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작품을 내손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내가 만들지 못한 물건은 없을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이상한 물건을 보면 종이접기와 전개하는 법등 제관에 관한 기술에 도전하게 되었고 그 무렵 중요한 공사가 있었고 공장장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었고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삼십여 명을 데리고 아주 고난이도의 공사를 진행하는데 아직은 기술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이 닥쳤고 급기야 사직하는 일까지 오게 되었고 한 달여 만에 원청 사장님으로부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전화를 받고서 다시 돌아와 그 공사를 마무리 하게 되었다.

바로 그 때 IMF가 터진 것이다. 진행 중이던 공사가 중단되고 있었고 갈 때가 없는데 그 일을 하던 원청사

 사장님은 한달에 천만 원만 번다는 생각이라면 광양으로 오라고 하였고 다른 한 분은 삼일만 일 좀 해주라고 하셨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결혼 초에 장모님이 보셨다는 사주대로 처갓집 동네에서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힘 삼아 삼일 도와달라는 쪽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고 첫날 공장을 보는 순간 이곳이라면 한 번 해 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첫 날 점심 먹고 일을 하고 있는데 그 회사 사장님이 모두 일을 중단 시키고 청소를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청소를 마치고 깨끗한 공장에서 나의 머리를 스치는 좋은 생각이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자리에 있을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당신 입에서 청소하라는 소리 안 듣겠소. 내 자신과의 다짐이었다.

그 날 이후 매일 새벽 7시40분 이전 어느 누구도 출근하기 전에 2,000평 되는 공장을 청소하기 시작했고, 일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남모르게 청소를 하던 어느 날 겨울 새벽이었다. 등 뒤에서 뭐하냐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회사 사장님이셨다.

그 날 조회시간에 사장님께 “그 친구 아침에 보니 청소하던데 왜 저런데?” 하고 물으시니 전 직원들이 동시에 그랬답니다.

“그 양반 날마다 그러는데요” 라고 그럼 회사 깨끗한 게 김 반장 저 친구 때문이란 말이냐고 직원들에게 하셨답니다.

그날 점심시간 이었다. “자네 식판 들고 내 앞으로 오소”라는 말이 들렸고, “자네 식사하고 내방으로 좀 오게” 두 마디를 들었다.

사장실로 들어가니 자기 회사에 공장장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하셨고 난 정중히 거절을 하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사업에 대한 꿈이 있었고 다시 직장 생활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그때쯤에는 여수에서 올라온 내 친구들과 내가 하는 일에 연일 감탄사를 보내오던 그 회사였고 어느 날 제작 검수를 나왔는데 나 혼자서 모두 수행하는 모습을 보시던 사장님이 또 부르셨습니다.

하시는 말씀이“내 회사에 들어오지 않으려면 우리 회사 공사를 자네가 맡아서 하소”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지만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사람이 있었기에 “그분을 배신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드렸고 사장님께서는 그 사람이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난 “그러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나를 키워 주셨던 분이 하 시는 말 너라면 살아남을 거다 해 보아라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첫 이야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노가다를 평생직업으로 살아오던 나에게 사장이 될 수 있는 길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처음으로 한 공사가 주어졌다. 도로에 설치되는 차광막을 제작하는데 도저히 남자들의 임금으로는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여자들을 모집하였고 20여명의 여자들에게 용접을 가르쳤고 평균임금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많은 직원들 중에 내가 뭐든지 제일 잘 할 수 있다는 기술 이였고 40여명의 직원들을 먹여 살리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공장의 제작물을 4년이란 기간동안 아무런 말썽 없이 할 수 있었고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사업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주위에서 조성 되어오고 있었다.

우연히 한국도로공사 일을 하기 위해서 어느 지사로 가는 길에 친구가 근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했더니 내가 가고 있는 그곳에 근무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편안한 첫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그 친구 하는 말 “자네 명함을 가져라” 그래서 사업체를 만들게 되었고 또 조금 지나니 법인체를 만들어야 한다하여 법인회사도 설립하게 되었고 또 갔더니 강구조 면허를 만들라 한다.

일이 이리 되고 보니 나를 그리도 아껴주시던 사장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나서 나를 부르더니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고 말씀하시면서 나가서 밖에서 해보라고 하셨다.

앞이 캄캄하였고 난 그날부터 어찌하면 작은 공장 하나를 가질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뉴스를 보는데 건물이 테러에 넘어가고 주식이 폭락을 한다는 뉴스를 보는 순간 “아~! 주식 한번 사보자”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911테러가 발생한 그날은 물론 3일 동안 출근을 안 하고 돈을 모았다.

4년 동안 40여명을 데리고 사업을 했다는데 돈 3,500여만 원 챙길 수 있었고, 아이들 앞으로 넣어두었던 교육보험이며 건강보험들을 모두 중도 해약하여 5,860여만 원이 전부였고 그 돈을 가방에 들고 증권사를 찾아갔다 주식 좀 주세요.

결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기에 가방을 보여주었고 어렵지 않게 삼성중공업 주식을 13,680주를 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식이 원상 복귀되고 엄청난 마진을 보게 되었고, 또한 팔고나니 또 폭락을 하였다. 그 돈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화순군청이었다. 농공단지 부지를 계약하기 위함 이였고 소개한데로 한 농공단지의 1,300평의 땅을 살 수 있었다.

 

드디어 내가 공장을 짓는 것 이다.

사년동안 몸담았던 회사에 아직 제작할 일이 많았지만 그만하기로 마음먹고 내 공장은 지어서 갑 시다 했더니 사장님께서 저 친구 잘 될 놈 이다 도와줄 거 있으면 도와주라고 직원들에게 지시를 하셨다고 한 다 무성한 잡초에 불을 태워 내가 그동안 힘들었던 걸 모두 태워 날려 보내고 공사 착공을 하 엿 다.

 남 의손 빌리지 않고 기초부터 마무리까지 조카들 데리고 딸 들 데리고 공장을 지 을 수 있었다 드디어 공장은 다 지였는데 공사가 없었다. 그렇게 영업을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 언젠가 나에게 작은 일을 줬던 분이 있었는데 경기도 송탄 톨게이트 공사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아~! 이것이 인생이구나!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었다.

그 공사를 하기위해서 자재를 공장에 채워두고 드디어 회사 준공식을 하게 되었다.

제일 좋아하는 분은 다름 아닌 부모님들 고맙다는 말만 하셨고 다음 날 아버지께서는 전화로 그러셨다 “춘수야! 고맙다.”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으셨는데 그게 부모의 마음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고속도로공사를 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첫 공사를 끝내게 되었고 많지는 않지만 먹고 살 정도의 회사 운영 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공사를 아주 쉽게 수주를 하였다 장성 톨게이트를 한참 설치하고 있는데 까만색 승용차가 오더니 사장님 좀 보자고 하시기에 내려갔더니 사장님 맞으시냐고 묻더니 놀 라 신다.

사장님이 직접 설치하시냐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충주 톨게이트를 주는 게 아닌 가 그 무렵 발을 크게 다쳐서 발에 깁스를 하고 충주설치를 하러 갔는데 그 곳에서 좋은 분을 만나게 된다.

 

 도장에 있어 다른 두 업체는 페인트를 규격대로 사용하지 않았고 난 도면 시방대로 사용하게 된 게 오늘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약간의 색상 차이가 있어도 도장 한 번 더 하는데 얼마나 드느냐 고 물으시기에 오백만원정도 필요하다했더니 삼백만원을 지원 해줄 테니 가능하냐고 물으시기에

 

 “아닙니다. 잘못되었다면 제 잘못이니 제가 수정하겠습니다.”하고 돌아서서 회사로 내려오는데 뒤 따라 전화가 왔다 공사에 남는 것도 없을 텐데 잘못된 것도 없는데 실수라 하면서 큰 돈인데 그냥 지시에 따른다고 하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앞으로 제 능력 되는대로 도와주신다고 하셨다.

 

지금은 회사 설립한지 이제 3년이 다 되어 오는 거 같다 열심히 일 해온 덕으로 작년에는 중부내륙 고속도로 현장에 휴게소 공사를 수주하게 되었고, 엄청난 자재파동 속에서 어쩌면 공사를 포기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공장 문을 닫고 노무비를 줄이기 위해서 내가 현장을 차고 수습하기에 이른다.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 공사를 수행하던 중 아버지의 칠순을 맞게 되는데 차마 현장을 놔두고 갈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 설치하는데 마주 앉은 직원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내가 우는걸 보았을 것이다. 일차 설치를 마치고 함께 올라간 직원들은 못하겠다고 다들 회사를 그만둔다고 한다. 앞이 캄캄하였고 그길로 내려와 다시 직원을 모집하여 올라갔는데, 무더위 속에서 견디어 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이 공사 끝 낼 때 까지 집에 안 간다.

 마음먹고 조카를 데리고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최선을 다하였고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조카가 그런다 삼춘아 이 현장에서 삼촌 작업복이 제일 더럽다 그런데 삼춘아 여기서 삼촌보다 큰 사업체를 가진 사람은 없는 거 같다 대화내용은 사실 이였지만 나의 마음은 아무런 생각이 없 엇다 오로지 지금 내가있는 휴게소 공사 마친다는 생각밖에 없 엇다 마지막 공정인 페인트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 번의공정착오 없이 추석을 앞두기 몇 일전 길고도 길었던 괴산 휴게소의 모습을 한 장의 사진에 담을 수가 있었다. 공사가 끝나던 날 현장소장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왜 당신을 추천했는지 알겠습니다.”라는 말을 뒤로하고 회사에 내려와 다시 직원모집을 하고 공사를 수주하고 일 년 동안 고생했다고 그랬을까 짧은 세월 3개 월여동안 그동안 해왔던 어느 해 일년보다 이미 공사금액을 넘어섰다.

 

오늘도 상당히 큰 공사에 견적서를 메일로 보내고 왜 기술을 배워야 하는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세상의 기술을 나의 기술로 만든다면 학력도 필요 없고, 지역연고도 필요 없는 나만의 방 식 대로 나는 몸으로 뛴다.

남과같이 해서는 절대로 남과같이 살 수 없다는 신념아래 올해보다는 내년 내년보다는 그 후년 내 나이 43살이 되는 해에는 나또한 회사부채비율0 %를 실현하고 직원들 월급걱정하지 않고 공사에 자금걱정하지 않는 건실한 업체로서 잘나가고 완벽한 기술을 갖춘 사람보다는 조금 모자라지만 성 실하게 자기기술을 닦아 나가면서 나보다는 회사를 먼저 생각하고 나의 회사에서 자기의 앞날의 꿈을 키워나가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함께 주위의 존경과 부러움 을 받으면서 지역에서나마 잘나가는 대표이사로 또한 평생 가슴의 한을 안고 살아오신 부모님의 남은 인생에 기 뿜을 안겨주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한가정의 남편으로 아빠로 살고 싶다